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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전투(白馬高地 戰鬪) 퍼온 글

6.25전쟁중 한국군의 가장 큰 승리였으며 중부 전선에서 한국군이 당하고 있던

수세 일변도를 뒤집어 놓은 전투이다.


특히 육군이 행할 수 있는 전투인 지상전에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전투,
그러니까 백병전, 화력전, 고지전 이 세가지를 모두 보여준 전투이기도 하다. 

백마고지는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그 주변이 평야이고 평강, 철원, 김화 이 세곳,

속칭 철의 삼각지를 차지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즉, 백마고지는 이 삼각형의 무게 중심역할이라고 할 수도 있고 교통망이 서로 연결된

교차점이어서 철원평야를 차지해야하는 중공군과 지켜야하는 국군 그 누구도 포기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백마고지가 남쪽에서는 고지가 되어 보이지만 북쪽에 서는 바로 그 근방에

더 높은 고지들이 즐비해서 백마고지를 점령한다고 해도 적에게 백마고지 자체가 계속

제압당하는 현상을 나타낸다는 것이었다.  

지형자체가 뺏고 빼앗는 혈투를 부르고 있었다.

아예 몇 킬로미터를 더 전진해 백마고지 전방까지 안전하게 먹어두면 좋을텐데라고 생각하겠지만

개전이후 만성적인 병력부족 상태가 계속되어 그럴 공세작전을 취할 능력이 국군에게 이미

1952년에는 상실되어 있었다.  

그러면 백마고지를 포기하면 어떻게 되는가?

백마고지 뿐만이 아니라 그러면 간신히 지탱되던 철원, 김화 이 두축이 무너지고 10-15Km의

전선이 붕괴됨과 동시에 예비병력이 거의 없던 국군과 유엔군에겐 자살에 가따운 결과가 되고

말 것이 분명했다.


 

김종오 장군이 9사단에 부임한 것은 52년 5월 30일이었다.
김종오 사단장은 부임 길에 미 제 8군 사령관과 미 제 9군단장을 만났다.  

그들은 한결같이 적이 곧 백마고지로 몰려올 것이라는 충고아닌 충고를 해주었다.  

묘한 우연이었다.  

김종오 사단장은 하필이면 격전 지역에 전투개시 직전에 부임해 가는 일을 당하곤 했다.  

6.25발발 직전에도 그랬고 이번 백마고지에도 적의 1개 군단이 몰려오는 곳에 사단장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었다.

9사단의 방어구역은 장송동-백마고지-학당리 간 10Km로 1952년 9월 22일에 사단에서

부대 교대를 실시, 30연대가 좌측, 29연대가 우측, 28연 대는 중앙에 위치했다.  

백마고지는 30연대 제 1대대가 맡고 있었다.  

 

또 한가지 김종오 장군의 자랑은 그의 6사단이 바로 압록강에 최초로 도착한 부대였다는 사실이다.  

그의 예하 연대가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이다.  

그런데 그때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사단이 거의 궤멸 직전가지 내몰리는 수모도 당해야만 했다.  

너무 성급한 전진과 방심, 그리고 통일에만 급급해 마치 남침하던 인민군처럼 훈련이 덜된 병사와

간부들을 급조해 만든 부대라는 것이 당시 대패의 원인이었다.  


편집자 駐 - 일종의 카더라 통신이긴 한데 또다른 이야기로는 이 때 김종오 장군은 6사단이 북진을

할 때 후방에서 따라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후송을 당하게 되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 쓰디쓴 패배의 경험으로 이번에는 김종오 장군도 복수를 다짐했다.  

중공군의 떼거리로 몰려오는 전술이라든지, 기만, 항복을 가장한 접근, 또한 천하무적에 가까운

야간습격전술 등을 예하 장병들에게 철저히 교육시켰다.  

따라서 그는 철저히 야간사격훈련과 야간전투훈련을 시켰다.  

또한 아군 구원부대가 올 때까지 버틸만한 깡다구라고나 할까...

그런 것을 위해 총검술 연습도 상당히 시켰다.  

이런 훈련의 효과는 전투개시 후 그 약효를 증명하게 된다.  

세상에 어떻게 1개사단이 1개 군단을 격파해버린단 말인가.  


편집자 駐 - 당시 대부분의 중공군이 인해전술용 부대여서 미군 1개사단만도 못한 경우가 많았다고는

하지만 3개 사단이 모인 것이 군단임을 감안할 때 인원수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게다가 당시 백마고지 전투에 투입된 중공군 38군의 경우 당시 중공군 내에서 최선참이자 최정예였다고 한다.



5월말이면 장마가 계속될 무렵이었다.  

그는 또한 진지 보강 공사를 강화 했다.
철조망은 모두 7겹으로 치게 했고, 각종지뢰도 닥치는대로 깔았다.  

그리고 격전중에는 고질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인 부상병을 나른답시고 부상병 한 명을

성한 병사 두명이 메고 와서 진지 이탈을 한 뒤 복귀를 하지 않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조건 경상자는

대피호에 대피시켰다가 전투 후 나르도록 대규모의 대피호도 준비했다.  

또한 대부분의 진지를 유개호화했고 교통호는 목높이까지 팠다.  

또한 부대 교대제도도 엄격하게 실시했다.  

격전을 치루면 무조건 48시간에 한 번씩 부대를 교대시켜 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상당히 중요하다.  

전쟁터에서 웃기는 원칙이 있는데 "용감한 병사는 먼저 죽는다."는 것이다.  

즉, 용감하게 싸운 부대는 계속 격전지구에서 전멸할 때까지 적을 상대하라고 하므로 용감해봤자

기다리는건 죽음 뿐이라는 것이다.  

김종오 장군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이런 부대 교대를 엄격하게 실시했고 이것이 장병들의 사기를

올리는 큰 힘이 되었다.  

백마고지를 놓고 싸우게 될 중공군은 제 38군으로 김종오 사단장이 압록강에 도달하였을 때 초산, 혜산

등지에서 김종오 장군의 6사단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 부대였다.  

중공군 제 38군은 만주에서 창설된 고참부대로 1.4후퇴 때 적의 선봉에 서서 아군을 수원까지

내몰았던 부대였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나 할까?  

정말 힘든 상대였다.



또한 다른 중공군 부대들이 대개 1개 군단이라고 해도 사실 미군 1개사단 이상의 화력을 갖지 못한

인해전술 전용부대였던 반면 이 38군은 백마고지 전투를 위해서 오랫동안 후방에서 교육받았고

완벽하게 소련식으로 훈련된, 완전 편성된 포병을 가진 막강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적의 제 13병단의 작전은 전에 말했듯이 일단 백마고지를 점령하고 이곳을 발판으로 손쉽게

철원 평야를 차지해 아군전선을 붕괴시키고 국군에게 심각한 정신적 군사적 피해를 입혀주는 것이었다.


당시 유엔군보다는 아무래도 국군이 장비나 화력, 간부의 능력 모두 열세였으므로 중공군은

한국군만 골라서 공격하고 소모시켜 전선을 돌파하고 별로 싸울 열의가 없던 유엔군의 전선을

공황상태로 만드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때쯤 모든 유엔군들이 전쟁에 시들해져 있었다.)  

38군 군장(우리의 군단장에 해당)은 112사단 과 114사단을 백마고지 탈취의 주력으로 내세우고

113사단은 예비로 했다.  

또, 공격부대에서 골수 당원을 골라 백마고지와 유사한 지형에서 모의 점령 훈련을 3개월 동안

수차례 시켰다.  




1952년 10월 2일은 추석이었다.  

사단에서는 그동안 참호공사와 전투훈련 등으로 지친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 연대대항

운동회를 열어 장병들의 사기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뒤 제 30연대 2대대장으로부터 급보가 날라왔다.  

"중공군 340연대소속으로 국부군 출신인 중령 한명이 아군 수색대에게 투항해 왔습니다."  

심문 결과 놀라운 사실도 밝혀졌다.  

중공군340연대가 10월4일부터 6일사이에 봉래호 댐의 수문을 열고 아군의 후방 보급로를 차단한 뒤

백마고지를 점령할 것이다는 사실이며 아예 중공군은 점령후에 입을 동기피복까지 준비했다는 것이다.  

놀란 백마고지담당 대대장(김영선)은 팬티만 입은 채 트럭에 대대원들을 싣고 황급히 달려갔다.



방어준비는 잘되어 있었다.  

대대지휘소는 백마고지 정상 남서쪽 300고지에 설치하고 그밑에 중화기 중대 (81밀리박격포3.5인치로켓등)를,

그리고 연대 전투단에서 배속받은 4.2인치 중박격포 3문을 무면고지 바로밑에 방열하고 전방위로 사격할 수

있는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고지 쟁탈전은 탱크가 직접 개입할 수도 없다.  

또한 항공기의 공격도 위력이 감소된다.  

곡사포의 포격이 효과적일 것 같지만 산의 고저가 다양해서 사각지대, 분명히 사거리 이내인데도 포탄이

떨어질 수가 없는 곳이 많고 포격제원을 산출해 내기도 쉽지않다.  

산악전에서는 일단은 병사 각개의 의지와 능력, 그리고 병력수와 수류탄이 많아야하고 가장 유리한

지원화력은 박격포이다.



박격포는 45도 이상으로 발사되므로 사각지대가 좁고 산악에서도 분해해서 옮길 수가 있다.  

연대의 각 대대는 백마고지를 둘러싸듯이 배치됐다.  

아예 포위당하는 것을 상정하고 배치를 한 것이다.  

거기다가 각 중대와 대대사이의 유선전화선은 사람 키만큼 묻어버려 적의 포격에도 단절되지 않게 했고

각 중대 진지 역시 포위당할 것을 예상하고 전면 방어태세로 만들었다.



또한 1주일분의 탄약 식량물을 비축해 두었고 유서, 유품을 따로 후방에 부쳐놓고 있는 상태였다.  

김종오 장군은 다음날 전화로 대대장을 불러 "곧 국군의 53전차중대와 미군의 73전차 대대 c중대를

배속시켜 지원할테니까 화력은 염려말라"고 전했다.  




10월 5 일.

적의 포탄이 한발 한발 작렬하더니 어느새 우박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폭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제 적이 온다.  

그러나 고개를 쳐든 아군에게 떨어지는 것은 적의 포탄뿐이었다.  

참호속에 쳐박힌 병사들은 미칠 지경이었다.  

이런 하루도 넘는 포격은 처음 보는 것이었고 적의 공격이 얼마나 맹렬할지를 미리 말해주는 것이었다.  

김종오장군은 이런 적의 사격으로 미루어 아군을 지치게하고 도리어 야간에 적이 공격을 감행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항공지원을 요청했다.

항공기 3개 편대가 날아와 적의 예상 집결지를 폭격했다.



영화에서 보면 6.25때 적에게 포격을 가하다가 안되면 항공지원을 부르는데 이건 거짓말이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당시에는 적과 아군의 소총교전거리는 일반적으로

200미터이고 적이 조금만 진격해도 100미터이다.  

이 거리는 소구경박격포와 유탄 발사기, 기관총으로 화망을 구성한다.  

일반적으로 포병 관측반에서 명중이라고 말하는 것이 105mm포 기준으로 탄착 예상지점에서

±15미터이내에서 떨어지는 것이므로 적이 아군과 100미터 이내로 들어오면 포격을 가하기도 힘들다.

물론 아군의 피해도 각오해야만 한다.  

그리고 아예 100미터 이내로 적이 밀고 들어오면 진내사격이라고 하는 것을 준비해야 되는데

이것은 지원받는 보병부대장의 동의가 있거나 관측장교가 보기에 꼭 필요할 때만 해야 한다.  

이 진내 사격이란 것은 아군과 적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아군의 희생을 각오하고 아군이 점령하고 있는

진지를 좌표로해서 포격을 때리는 것을 말한다.  

대개 두가지 때에 실행된다.  

이미 아군 보병부대가 전멸했을 때, 아니면 아군이 도저히 진지를 지킬 수가 없어서 후퇴할 때 적이

따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아니면 아군은 진지의 대피호에 대피하고 적을 모두 날려버릴 때

동반자살하는 식으로 써먹는다.  

항공지원은 당시의 수준으로는 진지에 육박중인 적에게 공격을 할 순 없었다.

게다가 소총으로 교전중인 적과의 거리가 최대한 200미터인데 이정도 거리에선 폭탄을 투하했다간

정말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고 기관총이나 야포 공격이 제일 큰 공격이었다.  

여기다가 산이 많고 숲이 많은 곳에선 머리에 모두 표시가 달려 있는 것도 아니므로 오폭사고가 많이 일어났다.

그러니까, 유능한 지휘관일수록 각종정보를 종합해서 미리미리 항공공격으로 폭격할 지점, 적의 사령부,

포병대, 병력 집적소, 탄약고 등을 강타해야 한다.  

김종오 장군의 생각대로 적은 19:15에 역곡천을 따라 아군의 후방으로 뚫고 들어와 10중대 앞으로 밀고 올라왔다.  

또한 조공은 낙타능선으로 공격해왔다.



낙타능선은 수풀이 울창하고 사각지대가 많아서 아군의 지원포격이 잘 먹히지 않는 곳이었다.  

적도 이 점을 노린 것이었다.  

대대장은 황급히 "남쪽고지로 옮겨 사수하라"고 명령했으나 중대는 와해 직전에 있었다.  

연대장 역시 사태의 위급함을 느끼고 9중대를 10중대의 돌파지역에 투입하고 전차중대는 돌파구에

조명탄을 쏜 뒤 일제사격을 거듭, 적을 저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적을 일단 항공공격과 포지원사격으로 묶어놓는다. 28연대는 즉각 증원준비를 완료하라.

적이 약해지면 즉각 반격을 개시한다."  

새벽 02:00 B-29 4대가 적의 예상 집결지인 하진, 명동을 강타하고 각종포 81문

(155밀리 32문, 105밀리 32문, 4.2인치 박격포 7문,  전차포 10문)으로 있는대로 돌파구에 포격을 가했으나

적의 돌파구는 넓어져만 갔다.  

05:00, 적의 병력수가 도저히 줄어들지 않고 늘어만 갔지만 다른 수가 없이 28연대 1대대에게

백마고지 탈환 명령이 내려졌다.  

48대의 항공기가 날아와 백마고지를 쑥밭으로 만들고 있던 적의 포병부대위에 3000파운드의 포탄을 퍼부었다.

28연대의 지원을 받은 30연대는 낙타능선으로 역습했지만 원낙 병력의 열세가 심해 어쩔 수 없었다.  

22:00 흰말같은 백마고지가 붉은 말처럼 피에 물들었을 때 백마고지의 주인은 중공군이 되고 만다.  

이날 이후 적과 국군은 뺏고 빼앗기는 싸움을 계속하게 된다.  

김종오 사단장은 제9군단장 젠킨스 소장에게 "사단 전병력으로 백마고지를 지켜야겠고 이렇게 극심한

병력 열세에세 작전을 계속하는 것은 너무 무모하다."고 건의했다.  

(사실 적의 1개연대가 올라가서 지키고 있는 고지를 아군 1개대대가 공격해서 빼앗고 있다는 것도 기적이었다.)  

젠킨스 군단장도 이 말을 인정하고 51연대를 배속시켜 사단 좌일선에 배치된 9사단 29연대도

백마고지쪽으로 투입시키도록 했다.  

모든 것을 건 도박이었다.



포로의 진술에 의하면 적도 막대한 피해를 입어 공격부대를 340연대에서 334연대로 교체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마저도 많은 피해를 입자 적은 또하나의 연대 342연대를 투입했다.  

10월9일 간신히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찾한 백마고지였는데 적의 새로운 342연대가 밀어닥치자

이미 만신창이가 된 아군은 적을 저지하지 못하고 붕괴되고 만다.  

처음으로 아군의 붕괴가 시작되어 엄청난 낙오병이 발생되었다.  

김동빈 부사단장이 길에 나가서 붙들어 모은 병력만도 400명이 넘었다고 하니까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당시에 너무나 많은 병사들이 전사해 황급히 후방 신병교육만 받은 병사들을 급히 전투에

투입해서 적의 포격과 공격에 어쩔줄 몰라 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10월10일 상처받지 않은 29연대가 역습, 백마고지를 다시 탈환한다.  

김종오 사단장은 즉각 28연대를 사단 좌측에 밀집배치해서 백마고지 방어를 돕게했다.

(30연대는 백마고지 전투 초기에 막대한 피해를 입어 정비를 위해 빠져 있었음)  

적도 남는건 병력밖에 없는데 그정도 피해에 그만둘 놈들이 아니었다.  

10월10일 4시부터 역습을 시작, 이때부터 하루에 3번씩 고지의 주인을 바꿔가는 싸움이 계속된다.  

김종오 사단장에게도 이제 결심을 해야 될 때가 왔다.



이렇게 적이 무차별적으로 인원을 투입해서 아군의 병력을 소모시키는 작전을 편다면 아무리 국군이

화력에 있어 우위에 있어도 백마고지사수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김종오 장군의 나이는 32세.  

군사교육이라고 받은 것은 일본군에서 몇 개월 동안의 장교교육을 받은 것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한국동란 개전이래 가장 잘 싸운 장군이 된 것은 참모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알았고

그 자신이 치밀한 전략가였고, 무식한 장군이 아니었기 때문이었 다.



솔직히 말해 한국군의 장군들은 지나치게 "무식한" 작전을 감행했다.  

마치 적이 아군의 꼭두각시같이 움직여주길 바라는 작전들..  

예를 들어 서울 함락 전 의정부에 나타난 채병덕은 '무조건 전차에 육탄 공격을 감행하라!' 고 했다.  

그때 그곳의 부대는 완전히 탄약이 고갈되어 수류탄조차 변변히 없었다.  

결국 곡사포 장약을 화염병에 달아서 돌진했고 병사들만 죽어 나갔다.  

"사수"란 말을 써놓고도 정작 자신들은 사단이 무너져서 자결한 사람은 정말 손에 꼽을 만하다.



김종오 장군은 다르다.  

그는 칼로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도 싸울 줄 아는 꾀돌이 장군이었던 것이다.  

김종오 장군은 참모들과 한참 이 상황을 이야기했다.  

"이런식으론 백마고지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제 앞으로 모든 화력을 동원하여 한 번 더 공격, 적을

궤멸시키고 다시는 빼앗기지 않는 작전을 세운다. 적에게 최대한의 인원 출혈을 강요한다." 참모들과

토의 결과 김사단장은 백마고지의 터줏대감이던 30연대의 김영선 대대를 이번 역습작전에

동원하기로 결심했다.

김영선 대대는 중공군의 공격전에 백마고지를 지키고 있다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정비를 위해 물러나 있었다.  

김영선 대대는 백마고지의 지리에 익숙해 있었고 3일간의 휴식으로 사기도 드높았다.  

공격명령을 받은 김영선 대대장은 김종오 사단장이 방문했을 때 "고지 점령을 장담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점령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해 김장군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편집자 駐 - 당시 30연대 1대대장이었던 김영선소령은 나중에 월남전이 한창이던 상황에 9사단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김종오 장군은 또 미군에게 뻔뻔하게 군 것으로도 유명하다.  

원래 한국군 장군들이 미군에게만은 좀 설설기는 스타일이 몇몇 있었는데, 김종오장군은 미 제 9군단장에게

한 번 왕창 대들었다.

9사단이 배속되어 있는 군단의 군단장인 젠킨스장군이 사단을 방문한 어느날.  

"이거, 사단에 온 고문관이 포탄 수를 제한하여 이렇게는 더 못싸우겠다."고 큰소리를 버럭 질렀다.  

별 말 아닌 것 같지만 사실 32세의 사관학교 출신도 아닌 우습게만 보이던 김종오 장군이 군단장에게

정면으로 개긴 말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9사단을 지원하던 포병은 거의 미군이었고, 9사단의 포탄도 젠킨스가 파견한 고문단(미군)이

맘대로 하게 되있었다.  

따라서 사실 이 말은 "군단장. 당신이 보낸 고문단 때문에 더러워서 못 싸우겠다."란 소리다.  

원래 배속 부대는 다루기가 까다롭다.

더군다나 인종적으로도 한국군을 우습게 보던 미군이니까 포탄을 잘 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여간 젠킨스 군단장도 좀 찔렸는지 "무제한으로 사격하라"고 포병고문단장을 질책했다.  

그리고 옆에 따라온 군단 포병단장(통상 1개군단 직할로 포병여단이 있음)은 이쁘게 보일려고 그랬는지

자신의 전속 부관까지  딸려 보내주고 김종오 사단장이 말하면 언제든지 포격해 주었다.  

그리고 아예 바로 옆에 있던 미 제 2사단의 화포까지 끌어들여 200문의 화포로 TOT사격을 가한 일도 있다.



[여기 서 TOT사격이란 화포가 한발 한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포탄이 동시에 발사되어 동시에

떨어지는 것이다. 본 필자가 군복무시절에 재수가 좋으면 한번 참여하게 된다는 공지합동훈련에 참여하게 됐고

그 때 포병부대가 포사격 훈련하는 것을 기회가 되어 본 적이 있다.  

18문으로 구성된 1개 대대가 단 한번 TOT사격을 하는 것을 관측소에서 봤는데 거짓말 안보태고 거의

800미터(레이저 거리측정기로 측정)는 산의 형상이 다르게 떡사발이 된다.  

그런데 200문이라니.  

중공군 뙤놈들... 아마 굉장히 많이 죽었을 것이다.  

왜 TOT사격이 위력적인가 하면 이렇다.  

포탄이 여기 저기 한 발 한 발 떨어지면 차량은 재빨리 튈 수도 있고 보병은 포탄이 떨어진 지점으로

몸을 피하면 잘하면 살 수도 있다.


거기다가 오히려 포탄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다른 시간에 낙하하면 적의 공격부대는...

"포격이 시작된다. 돌격!"하고 더 빨리 고지로 뛰어 올라오고 적이 고지를 방어하고 있을 때 포탄 한 발이

떨어지면 재빨리 대피호로 숨어 그 다음부터는 포탄 낭비만 된다. 




10월 12일 08시 김영선 대령이 지휘하는 제 30연대 1대대는 공격개시선을 박차고 돌진을 개시했다.  

김영선대대의 공격개시 4시간전에 공격했던 29연대는 적전 40미터에서 적의 기관총 화망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때는 정말 전사자의 군번줄이 한트럭분씩 나왔다고 한다.  

하여간 이 말을 들은 30연대 1대대 병사들은 가뜩이나 올라가면서 전사자들의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것을 본데다 그 말을 들으니 아예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는 것은 포기한다.  

인간 본연의 공포감 대신 실려서 내려가는 전우의 시체를 보고 오직 증오만이 불타오른다.  

"젠장..죽을 바예야 한발이라도 더 맞고 고깃값이라도 하고 죽는다."는 말까지 유행했다.  


이른바 악에 받친 상황이 되어버린건데 최초 29연대 격퇴후 한숨놓고 있던 적에게 김영선 대대(30 연대 1대대)는

지원 포격없이 기습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2시간후 또 다시 중공군의 중기관총에서 뿜어대는 화망에 전사자가 속출하고 정상 코앞에서

공격은 멈추어서고 만다.

이 광경을 본 30연대장은 2대대를 1대대의 우측에 투입, 증원했지만 이미 기습효과가 상실된 후여서

피해는 늘어만 갔다.  

제 1대대의 선봉 3중대가 진격이 부진하자 대대장은 바로 뒤에 있던 1중대를 돌격시켰다.  

1중대도 그러나 돌격선(적에게 육박전을 벌일 만큼 가까운 거리쯤 됨. 일반적으로 대략 500m 전후 거리) 바로 직전

3명의 소대장이 쓰러지고 1개중대에 불과 30여명의 병사만이 살아 남았다.  


1중대장의 교대요청 명령에 대대장은(그도 300 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막바지에 무슨 교대냐! 우린 이미 죽기로 각오하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사실 교대해줄 병력도 없었지만.



대대장이 돌격선에서 300미터까지 온 것은 정말...

유식하게 쓰자면 자결하겠다는 뜻이고 죽더라도 같이 죽자는 뜻이다.  

한마디로 목숨 걸었다는 뜻이고 그만큼 결의는 비장했다.  

사태가 점점 악화되어만 가고 있었을 때 30연대 1대대 1중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강승우 소위는

오귀봉, 안영권 두 병장에게 "돌진하자"며 수류탄을 꺼내 들었다.  

망할 놈의 중기관총을 부수지 않고는 여기까지 올라오며 죽어간 전우들의 피에게 뭐라고 할 말이 있을 것인가!



세명은 미친듯이 불을 뿜는 적의 중기관총좌로 돌진했다.  

잠시후 연기만이 솟아 오르고 적의 기관총은 멈췄다.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었고 나머지 대원은 일제히 돌격했다.  

그리고 완전히 중공군을 싹쓸어 으깨서 떡사발로 만들어 쫓아버렸다.  

고지에 돌입한 1중대원은 불과 10명.  

중대장은 중상을 입고 장교 는 전사 혹은 부상을 입었다.  

중대원들이 3용사의 행방을 찾아냈을 때 온 몸에 기관총탄이 박힌채 산화한 후였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적이 아직 점령하고 있는 낙타능선까지 점령해야 백마고지를 지킬 수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1대대가 공격했지만 워낙 적의 저항이 거세어 공격은 멈췄다.



하지만 다음날 사기가 오른 29연대가 재공 격을 감행, 낙타능선의 적을 뭉게 버렸고 백마고지는

아군에게 완전히 점령되게 된다.  

백마고지의 승리로 국군은 철의 삼각지대 중에서 무게중심점이후 지역을 차지했고 적의 정예 군단병력 중

2개사단을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다.


편집자 駐 - 말이 재기불능이고 중공군 38군은 후방으로 빠져 6.25가 휴전이 될 때까지 복구가 안될 정도로

치명상을 입어 더 이상 참전이 불가능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물론 9사단도 만만찮은 타격을 받긴 했지만 38군에 비해 효율적으로 인원관리가 된데다 이후 상대적으로

빠르게 회복이 되어 금화지역 전투 등등에서 성과를 올리게 된다.

덤으로 현리전투에서 당한 치욕도 되갚아주는 결과가 되어버린 전투이기도 하다.



원문 출처 :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6&dirId=60401&docId=75409&qb=67Cx66eI6rOg7KeA7KCE7Yis&enc=utf8§ion=kin&rank=6&search_sort=0&spq=1

 

※ 맞춤법 및 오타 수정, 문맥에 맞게 또는 상황에 따른 일부 수정 이외에 일체의 수정은 없음.

1개 사단이 1개 군단, 그것도 최정예라고 할만한 1개 군단을 발라버린건 정말...내가 가진 목숨바쳐 나라를 지키려는

크레이지 모드를 감안해도 진짜 미친듯이 싸운 것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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